어느 홈리스의 죽음 -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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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님 작성일16-02-04 11:01 조회6,470회 댓글0건본문
어느 홈리스의 죽음
역으로 쪽방으로 거리로 내몰리다 생을 마친 20년 경력 주방장 윤양호씨… 그의 죽음과 삶엔 ‘원·인·불·상’ 넉 자만 남았네
수십 년 쪽방에서만 살아온 그는 몸을 뒤척일 수도 없는 좁은 나무 관 속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좁아터졌어도 쪽방이 관은 아니다. 내일 갈아입을 옷가지 몇 벌, 말라붙은 밥이 든 밥솥과 버너, 남의 세상 떠들어대는 텔레비전. 비좁은 거처는 차가운 시선과 말들에 부대낀 몸을 누일 유일한 안식처. 오늘의 삶은 가라앉고 내일의 삶이 태어나는 곳이었고 그가 세상과 맺은 관계 자체였다.
관보다 넓은 쪽방이 안식처
2015년 11월, 한 쪽방 주민의 강제퇴거에 맞선 투쟁 이야기이다. 아저씨가 홀로 벌인 외로운 싸움은 못 가진 사람의 일상으로 보였겠지만, 당뇨에 협심증을 앓던 예순 넘은 그의 몸과 마음에는 또 한 번의 추방이 어떤 깊은 상처로 남았을까. 가난한 사람이 저마다 품은 삶의 증거는 그저 그런 일상으로 넘기기에는 가혹하다.
2016년 1월16일 아침, 할머니가 방문을 두드렸다. “아저씨 밥 잡숴요.” 주방장 출신인 그는 여전히 요리를 잘했지만 새로 이사 간 집 할머니는 국도 끓여 나누며 쪽방 사람들을 잘 챙겼다고 한다. 대답 없는 방문을 열었을 때 아저씨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고 한다. 사인은 원인 불상. 불쌍하다고 불상인지 알 수가 없다. 방바닥에 몸의 절반만 뉘고 신발도 벗지 못한 채 떠나버린 아저씨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쫓겨난 사람들이 가는 곳
1955년 전남 화순에서 태어난 아저씨는 6남매 중 셋째였다. 가난한 형편 탓에 초등학교만 겨우 마치고 중국집에서 일을 시작했다. 스무 살에 서울로 올라와 주방 보조 일을 하다 삼 년 만에 주방장이 되었다. 20년 동안 주방장 경력은 화려했다. 태원, 명보성, 다보성, 중국관, 남광…. 한번쯤은 배달을 시켜본 적 있을 법한 이름들이다. 사람 좋고 술 좋아하는 아저씨는 마지막으로 일한 중국집에서 오랫동안 월급을 받지 못하면서도 짜장면, 짬뽕, 탕수육, 깐풍기를 만들었다. 매일 열두 시간 땀을 뻘뻘 흘리며 지지고 볶고 끓였다.
노숙인이 넘쳐났다. 당장 갈 곳이 없으니 노숙이라도 해보자 했다. 회현역에 터를 잡았다. 동료가 생겼다. 절망 속에 갇혀 사느니 드넓은 거리를 집 삼아 새로운 벗들을 사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 춥고 고단했다. 집이 있었으면 했다. 따뜻한 밥 한 끼 지어먹을 공간이 필요했다.
2004년,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수급자로 선정되었다. 실로 오랜만에 소득이 생겼다. 월 20만원, 수급비의 3분의 2를 내면서 쪽방에 살기 시작했다. 일을 해야 수급을 준다며 자활사업에 참여하래서 했다. 그런데 분명 일을 하는데 한 푼도 모을 수 없었다. 아니 돈을 모으면 수급이 잘린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더구나 일을 하나 안 하나 받는 돈은 똑같았다. 앞으로 나아갈 수도 주저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답답한 노릇이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도무지 그림이 안 그려지는 것이었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고 가게 이름을 ‘호돌이 분식’이라 지어 창업을 하려 했다. 사회연대은행에 대출신청서를 냈지만 헛일이었다. 형님이 그리워 늦은 밤에 전화를 하면서도 말은 꼭 헛나간다. “술 좀 줄여라” 하면 “니가 술 사줬냐” 하는 식이다.
2004년, 거리의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는 활동가들을 알게 되었다. <노실사>(<노숙인복지와인권을실천하는사람들>, <홈리스행동>의 전신)는 달랐다. 전에 알던 복지사들과 쉼터 상담 직원들 같지 않게 이 사람들은 당사자들더러 조직을 만들자 했다. <노숙당사자모임 ‘한울타리회’>를 만들었다. 서울역에서 알던 사람, 영등포에서 알던 사람 몇몇이 복작복작 모임을 만들어 여기저기 함께 다녔다. 영등포 쪽방을 철거한다고 해서 데모를 했다. 서울역 공안이 아픈 노숙인을 짐수레에 실어 방치하다 죽게 했다. 또 데모를 했다. 영등포역에서 자던 노숙인이 방화셔터에 압사를 당했다. 또 데모를 했다. 최저생계비가 너무 낮으니 함께 올리자고 또 데모를 했다. 1-2종으로 나뉜 의료급여를 혜택이 확 깎이는 2종으로 무더기 강제전환한 용산구청 앞에 가서 또 데모를 했다. 더 이상 쫓겨나기 싫으니 막무가내 개발은 안 된다고 데모를 했다. 데모를 하다하다 이제는 연대를 하자고 세계 빈곤 철폐의 날 데모를 하지 않나, 국제 행동의 날을 함께 조직하지 않나, 세상에 국제적인 데모꾼이다. 어려움을 겪는 동료의 상담사 역할은 기본이었다.
요리사 윤양호 아저씨, 열무 윤양호 아저씨
배움이 적은 게 늘 한이었다. 교실도 얻지 못해 이리저리 쫓겨다니던 <노실사>의 주말배움터를 함께 했다. ‘열무’라는 별칭도 갖고 있었다. 뭐니 뭐니 해도 학생들과 교사들이 함께 하는 소풍과 모꼬지는 정말 신났다. 술을 기분 좋게 마시고 좋아하는 노래를 실컷 부를 수 있으니 말이다. <홈리스행동>의 아랫마을야학이 시작되면서는 조금 소원해졌다. 수년을 그렇게 데모하고 함께 배워도, 세상도 내 처지도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당사자모임 원년 멤버로서 이제는 노인 축에 속하니 새롭게 모여드는 홈리스 후배들 앞에서 예전에 이랬다고 꼰대질 할까 저어되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몸이 예전 같지가 않았다.
1월22일 영등포 신화병원에 빈소가 차려졌다. 지하 장례식장 일곱 개 방 중 유일하게 손님이 들었다. 6년 전 이맘때 국립의료원에서 치른 동자동 주민 최성우 아저씨의 장례가 떠올랐다. 비싼 음식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노실사> 사람들이 육개장을 끓여와 몰래 보온통에 채워 넣었다. 양호 아저씨 빈소에 모인 사람들은 여전히 냉장고에 든 음료수에는 웬만해선 손도 대지 않지만 당당하게 밥도 국도 떠다 먹고 소주도 마음껏 꺼내 마셨다.
기초생활수급자가 마지막으로 받는 장제급여가 그땐 50만원이던 것이 75만원으로 올라서는 아니다. <나눔과나눔>이라는 사회단체가 장례비용의 상당 부분을 지원해주기 때문이었다. 아저씨를 처음 모셨던 백병원에서 벌써 100만원이 들었다. 사체검안을 하고 법의관이 서류 한 장 작성해주는 데 25만원이 들었다.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어도 말이다. 상주가 된 <홈리스행동>은 그 흔한 모금 한 푼 하지 않았다. 장례를 치른 후 52만원이나 남았다고 감사편지를 돌렸다, 그들은.
가난한 이들의 장례
작년 ‘홈리스 추모제’ 날 양호 아저씨는 양호한 모습으로 아시바 철골을 열심히 날랐다. 그날 모신 영정 중에는 <노숙당사자모임 ‘한울타리회’> 시절 회장을 지냈던 송주상 형의 사진도 있었다. 용산참사 추모 집회에 함께하며 눈물을 흘렸던 주상이 형은 2009년 어느 날 집회 도중 중간에 빠져 밥을 먹으러 가는 동료들을 보며 “이게 운동이야!” 버럭 하고는 사라졌고 그 뒤로 맑은 정신상태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이미 2011년에 사망하여 무연고사로 화장되었다는 소식을 추모제 직전에 접했다. 동자동, 서울역 어귀에 포스터 한 장만 붙었어도 아는 사람이 수두룩하게 나왔을 터다. 법적, 혈연관계의 가족은 없지만 이웃이 그렇게나 많던 사람이다. 세상 모든 길이 자신의 집이고 세상 모든 이가 벗이었던 이들이 무연고자가 되어 위로 한마디 건네받지 못한 채 사라지는 것은 슬프고 화나는 일이다.
다음날 아저씨는 벽제의 유택동산에 뿌려졌다. 사후에 돌봐줄 이가 없는, 그래서 한데 섞여 뿌려진 사람들의 장지이다. 아저씨 가신 날, 용산참사 현장에서 추모제가 있었다. 모였던 사람들이 빠져나가면 곧 저 포클레인이 갈아엎을 이 땅 역시 유택동산 아니 백조일손(제주 섯알오름 4·3학살터)의 묘 아닌가 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곳곳에 가난한 사람들의 비명과 눈물이, 죽음이 흩뿌려져 있다.
최예륜 제7회 손바닥문학상 당선자
원문 URL =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113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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